거울-언어-지각-판단
현실과 반영 사이의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s)


안진국 (미술비평) 

거울 안에서 나는 내가 없는 곳에 있는 나를 본다. [거울의] 표면 뒤에 가상적으로 열리는 비실제적 공간에서, 나는 저편 내가 없는 곳에 있다. … 거울이 실제로 존재하는 한, 그리고 내가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그것이 일종의 재귀 효과를 지니는 한 그것은 헤테로토피아이다. 바로 거울에서부터 나는 내가 있는 자리에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나를 거기서 보기 때문이다.”
- 미셸 푸코,『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p.48.

한동안 거울을 생각했다. 거울과 거울 밖에 관한 생각이다. 거울 밖을 빠져나갈 생각을, 거울을 뚫는 것에 대한 생각을, 그리고 거울의 사실과 거짓에 관한 생각을 했다. 거울은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s). 장소 없는 장소이자 떠다니는 공간의 조각. 일종의 반(反)공간(contre-sepaces)이며,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utopies localisées). 불현듯 갑자기 거울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사유의 촉발은 강수빈의 작업이었다. “대상의 ‘정확한’ 상을 비추기 때문에 이게 ‘진짜’라는 환영, 허상,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거울을 (말 그대로) 뚫음으로써 “피상적인 현실과 그 너머의 생동하는 현실”을 드러내고(⟪매일의 가장 가운데⟫ 전시글), 더 나아가 “판단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며”(같은 글) 판단 그 자체를 작업으로 선보인 강수빈의 작업은 거울을 생각하게 했다. 진짜와 허상, 지각과 판단, 그리고 감각과 감정이 거울에 내재해 있다. 거울은 강수빈 작업의 본체이며 상징이다. 거울은 있음과 없음의 사이, 이데아와 미메시스 사이에 존재하는 헤테로토피아다.


실체와 반영: 교란 체계로서 거울과 언어
강수빈은 ‘핵심’과 ‘비핵심’의 구분에 관한 의문[<그래서 요점이…>(2020)], 실제와 디지털화의 차이[<Thinking process-1>(2020), <가상의 사과>(2021), <REAL-thing #1~9>(2021)], 채워진 공간과 비워진 공간, 본체와 조각(나머지)의 의미(<부푼 벽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2022)], 보여줌과 보여주지 않음의 이율배반성[<반영의 반영의(NULL)>(2022-2023), <반영된 풍경>(2022)] 등을 작업으로 보여왔다. 그는 서구의 이분법에 의해 중심과 주변, 주제와 배경,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등으로 위계화된 체계에 의문을 던지며 그 체계를 교란하는 작업을 해왔다. 지각과 판단, 관계에 관해 깊이 탐구했다. 이러한 작업의 흐름에서 작가가 거울과 언어에 도달한 것과, 인간의 지각과 판단을 실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것은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조각 거울을 통해 분절된 현실 세계를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현실과 비현실에 대한 지각을 교란하고, 언어의 특이성과 인간의 판단을 실험하는 바탕재로 거울을 사용했다. 거울은 절대적으로 현실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비현실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그 자리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각되려면 거울 저편에 있는, 현실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지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다. 거울은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위계적 체계를 교란한다. 강수빈은 <MEDIA> 시리즈(2021-2022)와 <작동하는 신체>(2023)를 통해 장소 없는 장소로서 거울이 지닌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동시에 보여줬다. 다양한 크기의 직사각형 거울들을 이어 붙여 호 형태의 거대한 거울을 만들거나 기다란 두 개의 거울이 직각을 이룬 입체형 거울을 연속으로 이어 붙인 작업들(<MEDIA> 시리즈), 그리고 그 작업을 마주하고 몸을 움직이는 퍼포머의 신체(<작동하는 신체>)는 현실과 반영의 교차 속에서 새로운 공감각을 느끼게 했다. 특히 <작동하는 신체>는 퍼포머의 존재(현실)와 그 퍼포머를 비추는 거울(반영),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이 중첩된 영상 작업으로,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의 사이에 생기는 권력과 상호 얽힘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관계의 중층화(重層化)를 의미 있게 보여준다.

언어의 특성을 드러내는 데도 강수빈은 거울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언어는 작가가 증강현실 기술로 <그래서 요점이…>를 제작했을 정도로 이전부터 관심을 뒀던 영역이다. 강수빈은 언어가 지닌 의미의 반영성과 시각적 가시성을 거울과 접목함으로써 언어의 특성을 다면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언어가 “뭔가를 축약하고 단순하게 전달하는 것 같지만, 뉘앙스라든지 차이, 즉 그 틈새가 있는데, 그런 틈새들을 찾아보고 싶다”면서 “거울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들은 [이런] 언어의 한계”라고 말했다(작가와의 인터뷰). 다시 말해서 언어의 한계를 거울이라는 물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익히 알려졌듯이, 언어는 기의(記意, signifie)와 기표(記標, signifiant)의 자의적 관계 맺음으로 형성된 체계로, 그 안에는 시각성, 자의성, 사회적 약속, 욕망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언어를 통해 관계 맺는 이 현실세계를 상징계라고 칭했다. 그리고 그는 언어적 구조의 한계 때문에 욕망이 생기고 지속된다고 봤다. 즉 언어가 욕망의 전제 조건이자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근본 원인이라고 본 것이다. 구조화된 언어에서 한 단어 한 단어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개인적인 지각과 욕망, 사회적 관계가 몇 겹씩 연결된 것이 언어(단어)다. 작가는 <약간의 진실> 시리즈(2023)를 통해 언어의 의미와 가시성(可視性)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어 간다. 이 시리즈는 거울의 반사면을 레터링 하듯이 지워내 글자 부분만 거울의 기능을 소멸시킴으로써 반영과 현실, 반사와 투과의 대립 양상을 형성함과 동시에 언어의 모호함을 드러낸 작품이다. 작가는 “두루뭉술한 의미는 있지만, 뉘앙스에 따라 주관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고, 확실성을 흐리는 단어인 ‘거의’, ‘약간’, ‘조금’, ‘꽤’ 등의 단어”를 선택하여 모호함을 배가시킨다(작업노트). 강수빈은 이렇게 만들어진 글자 거울판을 눕혀 놓고 점멸하는 조명을 비추거나, 일반 거울처럼 벽에 걸어 놓기도 한다. 공간을 분할하는 벽처럼 프레임을 세우고 그 일부분에 글자 거울판을 설치하거나, 모듈 형식으로 프레임을 설치해 부분적으로 글자 거울판을 장착하기도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반사된 공간과 반사면을 뚫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 공간의 교란, 그리고 반사(사유의 반영)와 현실(온전한 의미)이 혼재하면서 생기는 언어의 모호성을 직시하게 된다. <약간의 진실> 시리즈는 사유를 반영하는 언어의 다면적 특성과 온전한 의미에 닿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지각과 판단: 인간의 불/완전성
“석고 조형이라든지, 아크릴 조형이 한 꼭지이고, 거울과 언어를 결합한 게 한 꼭지로, 이렇게 두 가지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작가와의 인터뷰) 강수빈은 거울과 언어를 하나로 묶고, 석고 조형과 아크릴 조형을 하나로 묶는다. 후자는 <매일의 가장 가운데>(2023)과 <완벽한 가운데로 향하는 여정> 시리즈(2023), <누군가의 가운데>(2023) 등의 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작업들은 인간의 지각과 판단의 불명확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따라서 전자가 거울과 언어라는 대상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물리적 대상보다는 지각과 판단 같은 인간의 특성에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후자의 작업들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반복이다. “매일 가운데를 그린 지 세 달이 넘어간다.”라는 <‘매일의 가장 가운데’ 작업일지>의 내레이션으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매일 같은 크기의 정사각형 거울에 자신이 가운데라고 판단되는 지점에 원을 그리고 그 부분의 반사면을 벗겨 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같은 맥락에서 <완벽한 가운데로 향하는 여정 #2>는 석고 조형물의 반복 제작을 기록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반복해서 그린 원을 축적해서 디지털로 입체화하고, 그것을 3D 프린팅하여 모델링 조형물(원형)을 만든 후, 그것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반복적으로 석고 조형물을 제작한 작업이다. 또한, 정사각형 투명 아크릴판의 가운데에 점을 찍는 관객 참여형 작업인 <누군가의 가운데>도 반복된 행위의 축적이라는 면에서 같은 맥락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강수빈은 인간이 지닌 지각, 판단, 결정의 과정을 감지하고, 이러한 과정의 결과에서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도록 이끈다.

작가는 반복함에도 매번 새롭게 지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그 변화 과정에 주목하고 그것을 기록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물리적 작업의 지평에 있는 사유가 아니라, 더 넓은 사유로 나가기 위한 통로 역할을 한다. “작업에 관한 생각이 변화하는 상태, 더 나아가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변화하는 상태를 시각화하여 내 눈으로 바라보고, ‘변화’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난 어디에 기대어 이 변화를 불안정한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한다.”(⟪매일의 가장 가운데⟫ 전시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에는 더 완벽한 ‘가운데’, 더 완벽한 캐스팅(casting)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내재해 있다. 반복 숙달은 인간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한 징표다. 반복의 경험치가 가져올 안정적인 상태, 명확한 생각과 삶의 가치에 대한 바람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실패를 줄이려는 의지가 반복의 수행성에 스며 있다.

하지만 여전히 완벽한 ‘가운데’를 찾는 건 묘연하고, 거울 속에 비친 공간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있으며, 온전한 의미에 닿기에는 언어는 너무 자의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강수빈은 무엇도 분명하지 않은 세상의 의미를 거울과 언어로 드러내고, 지각과 판단으로 그 변화를 기록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헤테로토피아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없는(ou-)’과 ‘장소(toppos)’를 결합하여 만든 단어다.— 반면,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장소를 의미한다. 미셸 푸코는 거울이 이러한 장소 중 하나라고 말했다.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 상징으로서 헤테로토피아는 언어일 수도 있고, 반복이라는 행위일 수도 있다. 의미가 존재하지만 온전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언어이며, 완벽을 위해 반복하지만 완벽할 수 없는 것이 반복 행위이다. 유토피아와 다르게 현실에 존재하는 이러한 대상과 행위는 근원(이데아)을 느낄 수 있어 경이로움을 준다. 하지만 결국 그 근원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늘 변하고 불완전하다. 강수빈은 “난 어디에 기대어 이 변화를 불안정한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한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데아와 미메시스 사이에 존재하는 헤테로토피아다. 강수빈은 이 헤테로토피아에서 현실과 반영의 의미를 되묻고, 변화 그 자체를 기록하며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탐색하고 있다.